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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끌어 건너는 갯배, 《가을동화》를 찍은 속초 아바이마을로
갯배에는 엔진이 없다. 한국 북동쪽 해안 도시 속초의 좁은 물길을 가로질러 걸린 쇠줄에 평평한 철판 갑판을 꿰어 놓은 것이 전부이고, 배는 그 위에 선 사람들이 당겨야만 움직인다. 난간 앞에 선 누군가가 쇠갈고리를 줄에 걸고 몸을 뒤로 젖히면, 건너편 기슭이 손 몇 뼘씩 다가온다. 많은 방문객이 이 뱃길을 처음 본 것은 사반세기 전 한 텔레비전 드라마에서였다. 그래도 이곳에 올 가장 좋은 이유는 여전히 건너는 일 그 자체다.
내 손으로 끄는 나룻배
이 배의 이름은 갯배다. 「갯」은 바다와 뭍이 만나는 물가를, 「배」는 말 그대로 배를 뜻한다. 갯배는 속초관광수산시장에서 걸어서 몇 분 거리인 중앙동 쪽과, 아바이마을이 자리한 모래톱 청호동 사이를 오간다. 물길이 좁아서 배에 오르기 전부터 건너편 가게 간판이 읽히고, 건너는 데는 2분 남짓이면 끝난다.
줄을 당기는 일은 대부분 선원이 맡지만 난간에는 승객용 갈고리도 걸려 있고, 장바구니 카트를 끄는 동네 주민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곧잘 한몫 거든다. 쇠줄은 젖어 있고 모래알이 서걱거린다. 갈고리가 둔탁한 쇳소리를 내며 줄을 물면 갑판이 덜컹 앞으로 나아간다. 선착장에서 약간의 뱃삯을 받는데, 금액도 받는 방식도 바뀔 수 있으니 카드가 될 거라 짐작하지 말고 소액 지폐를 몇 장 챙긴 뒤 붙어 있는 안내문을 확인하자. 지금은 마을 위로 도로 다리 두 개가 걸쳐 있어 차는 더 이상 갯배를 탈 필요가 없다. 그래도 걸어서 다니는 사람들은 여전히 갯배를 탄다. 시장으로 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들이 세운 마을
청호동은 한쪽으로는 탁 트인 동해를, 다른 한쪽으로는 고깃배가 줄지어 선 잔잔한 석호 청초호를 낀 모래톱이다. 한국전쟁 중 한반도 북동쪽 끝 함경도에서 온 가족들이 해안을 따라 내려와, 아무도 원치 않던 이 땅에 집을 낮고 서둘러 지었다. 전쟁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아바이」는 노인이나 할아버지를 가리키는 함경도 말인데, 기다리는 동안 마을을 지켜 온 윗세대를 부르던 이 말이 그대로 동네 이름이 되었다.
오늘 이곳을 걷다 보면 나지막한 집들을 지나게 되고, 몇몇 집의 평평한 콘크리트 지붕 위에서는 빨래와 고추가 마른다. 집과 집 사이는 어깨 둘이 겨우 지날 만한 골목으로 이어진다. 낡은 스티로폼 생선 상자는 고추와 대파를 심은 화분이 되었다. 날이 추워지면 해와 바람이 드는 곳마다 줄에 오징어와 명태가 걸린다. 큰길가 식당 간판 몇 곳에는 북쪽 고장의 지명이 적혀 있고, 차림표도 그 북쪽을 따라간다. 골목 안에서는 목소리를 낮추자. 이곳은 촬영지이기 전에 사람이 사는 동네이고, 현관문이 골목으로 바로 열린다.
《가을동화》가 남긴 것
2000년에 방영된 KBS 드라마 《가을동화》는 여주인공 은서를 속초에 살게 했고, 카메라는 몇 번이고 갯배와 이 골목으로 돌아왔다. 이후 몇 년에 걸쳐 드라마가 아시아 곳곳으로 퍼지면서, 아바이마을은 촬영지를 찾아 나선 해외 시청자들이 일찍부터 들르는 곳이 되었다. 청호동 쪽 선착장 근처에는 은서네 집이라고 표시된 집이 지금도 남아 있고, 바깥벽에는 드라마 스틸 사진을 붙인 판이 걸려 있다.
스틸 사진은 바닷바람의 소금기에 빛이 바랬고, 사진판은 이제 차림표며 카페 간판과 자리를 나눠 쓴다. 한국의 오래된 드라마 촬영지는 대개 이렇게 된다. 제작진은 떠나고, 거리는 제 할 일을 계속하고, 이야기는 진짜 부엌 옆에 붙은 코팅된 안내판 속에서 살아남는다. 그 뒤로도 여행 프로그램들이 갯배 위에서 촬영을 이어 왔기에, 화면에 나오는 횟수로는 집보다 뱃길이 더 많다. 드라마로 익숙해진 그 구도를 담고 싶다면 중앙동 선착장에 서서 물길 건너 나지막한 지붕들을 바라보자. 승객의 갈고리가 걸린 쇠줄을 앞쪽에 넣으면 된다.
북동쪽에서 건너온 맛
선착장에서 마을 안으로 이어지는 골목에는 아바이순대를 내는 식당이 줄지어 있다. 돼지 창자에 찹쌀, 선지, 배추, 숙주를 꽉 채워 쪄 낸 굵은 순대로, 두툼하게 썰어 나온다. 곁들여 나오는 새우젓을 한 점마다 살짝 찍어 먹는다. 오징어순대를 함께 시키는 테이블도 많다. 오징어 한 마리를 통째로 비슷한 소로 채워 썬 뒤, 달걀물을 입혀 가장자리가 노릇해질 때까지 부쳐 낸다. 두 가지를 섞은 모둠은 대개 여럿이 나눠 먹는 양이니, 혼자라면 1인분이 되는지 물어보거나 한 가지만 고르자.
함경도 사람들은 냉면도 이 바닷가로 가져왔다. 북동쪽식 냉면은 가늘고 아주 쫄깃한 전분 면을 쓰는데, 속초에서는 새콤하고 매운 빨간 양념에 무친 날생선, 곧 회를 얹은 회냉면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다시 물길을 건너면 시장에서 닭강정을 판다. 튀긴 닭을 끈적하고 달콤한 양념에 버무려 들고 가기 좋게 상자에 담아 준다.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 안, 사람들 무릎 위에 쌓인 그 상자를 다시 보게 될 공산이 크다.
아바이마을에서는 지금도 갯배 줄을 손으로 당겨 건너편으로 간다.
가는 길, 그리고 언제 갈까
서울에서 속초행 버스는 강남의 서울고속버스터미널과 2호선 강변역 옆 동서울터미널에서 출발한다. 길이 막히지 않으면 두 시간 반 정도 걸리지만, 여름철과 공휴일 주말에는 훨씬 오래 걸린다. 시간표와 요금은 버스 회사가 정하므로 각 회사 예매 사이트나 터미널 매표소에서 확인하고, 주말이라면 미리 예매해 두자. 속초의 버스터미널 두 곳 중 어디에 내리든 택시나 시내버스로 조금만 가면 수산시장이고, 갯배 선착장은 거기서 걸어서 금방이다.
갯배가 가장 한산한 때는 해수욕객들이 건너오기 전인 평일 오전이다. 늦가을은 드라마 제목과도, 석호 위로 내려앉는 빛과도 잘 어울린다. 겨울은 맑지만, 탁 트인 갑판에서 젖은 쇠를 손에 쥐고 있으면 살을 엘 듯 추우니 장갑을 챙기자. 바람이 강하거나 물결이 거칠면 갯배 운항이 멈출 수 있고, 식당 영업시간과 휴무일도 제각각이다. 식사 계획을 세우기 전에 선착장 안내문과 네이버 지도의 식당 정보를 확인하자. 피해야 할 실수가 하나 있다. 갯배가 경사로에 완전히 닿기 전에 내리는 것이다. 당기기를 멈춘 뒤에도 갑판은 잠시 더 밀려가고, 철판과 콘크리트 사이의 바로 그 틈에서 사람들이 발을 헛디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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